30여 년 만에 열린 러시아-아르메니아 철도 화물길... 그 의미는?
러시아산 곡물과 비료가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운송되는 새로운 철도 물류가 2025년 말 시작돼 2026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30여 년간 국경을 닫아온 점을 고려하면, 이 화물길은 단순한 물류 개선을 넘어 남카프카스의 정치·경제 지형 변화를 상징한다.
아르메니아 통신사 ARKA에 따르면 2026년 6월까지 아제르바이잔을 경유해 아르메니아로 운송된 화물은 약 4만 5,000톤에 이른다. 러시아산 밀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비료 약 8,000톤, 알루미늄 133톤, 메밀 68톤, 무연탄 414톤 등도 포함됐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산 연료(휘발유·디젤)도 별도로 아르메니아에 수출했다.
이 화물길이 열린 직접적 계기는 2025년 8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정상회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가 적대행위 종식 선언에 서명했고, 이 자리에서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을 아르메니아 남부를 통해 연결하는 이른바 '장게주르 회랑' 문제의 처리 방향이 합의됐다. 그 후속으로 2025년 10월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르메니아로 향하는 화물 통과 제한을 모두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첫 시험운송은 카자흐스탄산 밀이었다.
러시아 국영 통신사 타스에 따르면 2025년 11월 러시아 교통부는 울리야놉스크주 디미트로브그라드역에서 출발한 밀 1,000톤 이상(15량)이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초 이후 아제르바이잔을 경유한 첫 러시아 철도 화물이었다. 러시아는 이후 품목을 밀에서 비료·메밀·알루미늄·석유제품 등으로 확대했다.
운송은 2026년에도 계속됐다. 아제르바이잔 국영 통신사 아제르타지(AZERTAC)에 따르면 2026년 6월 러시아산 밀을 실은 화물열차가 바쿠 인근 빌라자리역에서 출발해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이러한 운송은 러시아·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부총리급 3자 실무그룹의 협의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러시아의 셈법: 연결성 확대와 영향력 유지
러시아는 이 화물길을 자국의 남카프카스 연결성과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통합을 강화하는 계기로 평가한다. 알렉세이 오베르추크 러시아 부총리는 러시아산 곡물열차가 조지아-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은 것과 관련해, 이 노선이 남카프카스 평화 정착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며 러시아와 남카프카스 국가들의 교통 연결성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그는 새 노선이 EAEU 회원국 상품의 아르메니아 시장 접근성과, 아르메니아 상품의 EAEU 시장 접근성을 함께 높인다고 설명했다.
러시아에 이 노선은 경제적 실익과 지정학적 함의를 동시에 갖는다. 아르메니아는 EAEU 회원국이면서도 최근 유럽연합(EU)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러시아 중심 안보구조에서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러시아로서는 아제르바이잔 경유 물류를 통해 아르메니아와의 경제적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역내 영향력을 지키는 수단이 된다. 러시아 외무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번영을 위한 트럼프 노선(TRIPP)'이 미-이란 갈등 상황에서 위험을 안고 있다고 언급하며, 미국 주도 연결성 구상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의 딜레마: 경제 이익과 전략적 자율성
아르메니아에게 이 화물길은 물류비 절감과 식량·에너지 공급 안정이라는 실익을 준다. 아르메니아는 연간 약 45만~50만 톤의 곡물을 수입하는데, 그동안 조지아 육로와 흑해 항로에 크게 의존해 왔다. 아제르바이잔 경유 철도가 열리면 공급 경로가 다양해지고 운송비가 낮아질 수 있다.
동시에 아르메니아는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파시냔 총리는 이 화물 운송을 2025년 미국 중재로 이뤄진 합의의 이행이자 아제르바이잔과의 평화 정착에 기여하는 조치로 평가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통한 곡물·에너지 의존이 커지면 EU와의 관계 강화, 안보 다변화라는 아르메니아의 목표와 긴장을 빚을 수 있다. 아르메니아 국내에서는 친러시아 야당과 친유럽 성향의 정부·여당 사이에서 대외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TRIPP와 지역 연결성의 미래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은 2026년 3월 발표한 보고서 「남카프카스의 재배선: TRIPP와 연결성의 새로운 지정학」에서 남카프카스의 교통로 재개가 지역 정치를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 저자인 토머스 드 발(카네기 유럽 선임연구원), 아레그 코치냔(아르메니아평의회 회장), 자우르 시리예프(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센터 비상근연구원)는 그동안 남카프카스의 파이프라인과 철도 계획이 협력의 수단이 아니라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갈등의 연장선에서 평가돼 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TRIPP가 연결성을 경쟁이 아닌 관계 정상화의 실질적 토대로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TRIPP는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나히체반을 아르메니아 영토를 통해 잇되 아르메니아의 주권과 관할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란 국경을 따라 놓인 옛 철도를 복원하고 광케이블·송전선·가스관을 함께 건설하는 구상이다. 2026년 1월 미국과 아르메니아는 이행 프레임워크를 공개했다. 다만 전쟁과 적대의 기억이 남은 두 사회가 제한적 상호의존조차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정치적 신뢰가 필요하며, 아르메니아 국내 정치와 지역 정세에 따라 진전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이들은 진단했다.
현재 이뤄지는 러시아산 곡물의 아제르바이잔 경유 운송은 대규모 TRIPP 철도가 완성되기 전 단계의 화물 흐름이다. 그럼에도 30여 년간 닫혀 있던 국경을 넘어 상품이 오간다는 사실 자체가 남카프카스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지아는 이 흐름에서 통과국이자 경쟁 물류축으로서의 위치를 재검토해야 하고, 아제르바이잔은 통과 수익과 대아르메니아 관계 정상화의 지렛대를 동시에 확보하게 됐다.
남카프카스의 교통로 재개는 물류비 절감과 무역 확대라는 경제적 효과를 넘어, 러시아·미국·EU·튀르키예·이란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사안이다. 이 화물길이 일회성 상징에 그칠지, 아니면 항구적인 지역 연결망으로 발전할지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평화협정의 최종 체결, TRIPP 철도의 실제 건설, 각국의 정치적 의지와 역내외 정세에 달려 있다.
출처
- ARKA, "45,000 tons of cargo have already been transported to Armenia via Azerbaijan," 2026-05-13, https://arka.am/en/news/politics/45-000-tons-of-cargo-have-already-been-transported-to-armenia-via-azerbaijan/
- Caspian News, "Russia Ships More Wheat to Armenia via Azerbaijan Rail Transit," 2026-07-03, https://caspiannews.com/news-detail/russia-ships-more-wheat-to-armenia-via-azerbaijan-rail-transit-2026-7-3-22/
-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Rewiring the South Caucasus: TRIPP and the New Geopolitics of Connectivity," 2026-03, https://carnegieendowment.org/research/2026/03/rewiring-the-south-caucasus-tripp-and-the-new-geopolitics-of-connectivity
- Interfax, "Russia welcomes launch of rail transport with Armenia via Azerbaijani, Georgian territory - deputy PM," 2025-11-06, https://interfax.com/newsroom/top-stories/114694/
- TASS, "Russia delivers wheat to Armenia via railway through Azerbaijan," 2025-11-06, https://tass.com/economy/2039813
- The White House / trilateral declaration coverage (Caspian News), Aliyev-Pashinyan-Trump Washington declaration, 202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