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교역은 먼저 움직이지만 최종 평화협정은 여전히 미완

유라시아뉴스 편집국 2026. 8. 7. 22:04

2026년 7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는 직접교역과 고위급 접촉이 확대되고 있지만, 2025년 8월 가서명한 평화·국가간관계 수립 협정은 아직 최종 서명과 비준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양측은 전쟁 이후의 관계가 사실상 평화 상태에 들어섰다는 데는 점차 가까운 표현을 쓰고 있지만, 협정의 제도화 조건을 둘러싼 입장 차이는 남아 있다.

 

가장 큰 쟁점은 아르메니아 헌법 문제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헌법 전문이 1990년 독립선언을 참조하고, 해당 선언이 1989년 소련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통합 결정을 언급한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바쿠는 이를 자국 영토에 대한 잠재적 권리주장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관련 표현이 제거되기 전에는 평화협정 최종 서명이 어렵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외무장관 제이훈 바이라모프(Jeyhun Bayramov)는 7월 9일 이 입장을 다시 확인하며, 아제르바이잔이 협정 문안과 관련해 해야 할 작업은 사실상 마쳤고 남은 핵심 조건은 아르메니아 헌법 문제라고 밝혔다. 아르메니아 국영통신 아르멘프레스도 바이라모프의 발언을 전하며, 바쿠가 헌법 문제를 최종 서명의 전제조건으로 계속 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제르바이잔 현지 APA도 7월 17일 바이라모프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는 사실상 평화가 존재한다"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동시에 평화과정에서 남은 사안의 해결이 장기적 안정에 필요하다고 밝혔다.

 

아르메니아 측 해석은 다르다. 아르메니아 외무부는 현행 헌법이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영토주장을 담고 있다는 바쿠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라라트 미르조얀(Ararat Mirzoyan) 외무장관은 2026년 5월 헌법개정 문제는 양국 간 협상 의제가 아니라 아르메니아 내부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아제르바이잔이 헌법 개정을 협정 서명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지만, 예레반은 그러한 연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헌법재판소 판결과 정부의 활용은 구분해야

아르메니아 헌법재판소는 2024년 9월 26일 결정 SDV-1749에서 알마아타 선언에 기초한 국경획정 원칙이 헌법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재판소는 동시에 헌법 전문이 비개정적 성격을 갖는다는 기존 법리를 재확인하면서도, 헌법 전문이 1990년 독립선언을 참조한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선언의 모든 문구가 독립적으로 헌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이 판결을 현행 헌법이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영토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는 주장의 법적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이러한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바쿠는 헌법 전문에 독립선언에 대한 참조가 남아 있는 한 향후 법적 해석의 여지가 지속된다고 보고, 해당 문제를 최종 평화협정 서명의 선결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평화 초안'과 '최종 서명' 사이의 간극

양국 외무장관은 2025년 8월 8일 워싱턴에서 '아르메니아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공화국 간 평화 및 국가간관계 수립에 관한 협정' 초안에 가서명했다. 양측 정부가 이후 공개한 문안은 상대국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상호 인정하고, 현재나 미래에 서로 영토주장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포함한다.

 

협정 제2조는 양국이 서로에 대해 영토주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주장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시한다. 또 협정은 각국이 국내법을 이유로 협정상 의무를 회피할 수 없도록 하는 구조를 두고 있다. 아르메니아 측은 바로 이 문안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우려를 해소하는 가장 직접적인 법적 장치라고 주장한다.

 

협정 제7조는 양국이 상호 국경을 따라 제3국 병력을 배치하지 않도록 하고, 국경 획정·표지가 완료될 때까지 상호 합의한 안보·신뢰구축 조치를 시행하도록 규정한다. 평화협정이 단순한 상호 영토인정 문서가 아니라 국경 안보체제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가서명은 최종 서명이나 발효와 동일하지 않다. 공개된 협정 제16조에 따르면 협정은 양국이 각자의 국내절차 완료를 통보하는 문서를 교환한 뒤 발효된다. 따라서 2025년 워싱턴 합의는 문안 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됐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지만, 국제법상 정식 평화협정이 완전히 체결·발효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가서명 단계가 아무런 법적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협정 제12조는 1969년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에 따라 협정 발효 전에도 협정의 대상과 목적을 훼손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규정한다. 협정의 정식 발효와 발효 전 자제의무는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다.

 

협정 제17조는 아르메니아어·아제르바이잔어·영어본을 모두 정본으로 규정하면서, 문언의 의미에 차이가 발생할 경우 영어본을 우선하도록 했다. 민감한 협정 해석에서 실질적 의미를 갖는 장치다.

 

흥미로운 점은 양국 지도부가 법적 상태와 별개로 '실질적 평화' 또는 '사실상의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 총리는 2026년 3월 유럽의회 연설에서 2025년 워싱턴 공동선언을 통해 양국이 본질적으로 평화를 확립했다고 평가했고, 5월 유럽정치공동체 정상회의에서도 "현재 아제르바이잔과 평화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바이라모프 외무장관도 7월 17일 양국 사이에 '사실상 평화'가 존재한다고 평가했다.

 

즉 양측 모두 전쟁상태가 끝나고 실질적 정상화가 진행 중이라는 데에는 가까운 인식을 보이고 있지만, 이를 최종적이고 법적으로 완결된 평화협정으로 제도화하는 조건에서는 차이가 남아 있는 셈이다.

 

정치협정보다 먼저 움직이는 교역과 직접접촉

직접교역과 인적 접촉은 최종 협정 체결보다 앞서 움직이고 있다. 2026년 2월 4일 아부다비에서 열린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 회담의 양측 공식 발표는 사실상 동일했다. 양국 정상은 직접교역이 시작됐고, 아제르바이잔산 석유제품이 아르메니아로 계속 수출되고 있으며, 제3국산 곡물과 다른 화물이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경유해 아르메니아로 운송되고 있다는 점을 함께 확인했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실의 발표와 아르메니아 총리실 발표 모두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 양측은 경제·통상 협력 확대 가능성을 계속 검토하고 시민사회 대표의 상호 방문도 확대하기로 했다. 이는 교역 재개가 한쪽의 일방적 주장이나 선전이 아니라 양국이 공동으로 확인한 정상화 조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직접 고위급 접촉도 늘었다. 6월 14일 히크메트 하지예프(Hikmet Hajiyev)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외교정책보좌관은 아르메니아 딜리잔에서 아르멘 그리고리안(Armen Grigoryan) 국가안보회의 서기와 회담했다. 아르메니아 측은 하지예프 대표단이 이미 획정·표지 작업이 완료된 국경 구간을 통해 정식 절차를 거쳐 입국했다고 밝혔다. 양측 발표문은 평화의제와 신뢰구축 조치를 논의했으며 실무 접촉을 계속하기로 했다는 데 일치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협정이 먼저 체결되고 교역과 접촉이 뒤따르는' 전통적인 정상화 순서와 다소 다르다. 현재 남캅카스에서는 실무적 거래와 접촉이 먼저 늘고, 그것이 정치적 평화의 제도화를 뒷받침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다만 경제적 상호의존이 확대된다고 해서 헌법, 국경획정, 안보보장 등 민감한 정치 쟁점이 자동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TRIPP, 평화협정 본문 밖의 별도 트랙

양국 관계 정상화가 진전될 경우 가장 큰 구조적 변화 중 하나는 남캅카스 교통망이다. 미국과 아르메니아는 2026년 TRIPP(Trump Route for International Peace and Prosperity) 추진을 위한 전략협력 기본협정에 서명했다. 이 구상은 아르메니아 남부를 통과해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을 연결하는 교통축을 포함하며, 약 43km 구간이 핵심 연결고리로 거론돼 왔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TRIPP가 가서명된 평화협정 본문에 포함된 조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5년 8월 워싱턴 공동선언도 평화협정 가서명과 교통망 개방·TRIPP 추진을 별도 항목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의 법적 제도화와 아르메니아 남부를 통한 연결망 구축은 서로 연계돼 있지만 별도의 협의·이행 절차를 밟고 있다.

 

이 사업을 설명할 때는 양측의 관점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TRIPP를 본토와 나히체반을 연결하고 더 넓게는 카스피해 횡단 교역망을 강화하는 핵심 인프라로 본다. 바이라모프 외무장관은 7월 9일 아제르바이잔 측 진입·출구 구간의 인프라 작업이 진행 중이며 미국과 아르메니아 간 협의도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아르메니아와 미국이 체결한 기본협정은 TRIPP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운영되는 모든 구간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완전한 주권, 영토보전, 관할권을 유지한다고 명시한다. 아르메니아 측은 이 사업을 아제르바이잔을 위한 통과로만 설명하지 않고, 자국 역시 국제 및 국내 교통망 확대의 상호 이익을 얻는 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TRIPP를 단순히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나히체반을 잇는 통로'로만 설명하면 아르메니아 측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주권 문제를 빠뜨리게 된다. 반대로 아르메니아의 경제적 연결성 확대만 강조하면 아제르바이잔이 이 사업에 부여하는 전략적 의미를 축소하게 된다. 양국 관계 정상화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를 하나의 제도 안에서 조정할 수 있느냐에 있다.

 

헌법개정은 외교 조건이자 아르메니아 국내 정치 문제

아르메니아에서는 새 헌법 논의 자체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아제르바이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치로 규정하지 않는다. 알렌 시모냔(Alen Simonyan) 국회의장은 3월 새 헌법 추진은 아제르바이잔이 아니라 아르메니아의 국가적 필요와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르조얀 외무장관 역시 헌법개정 여부는 전적으로 아르메니아 국민이 결정할 국내 문제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이미 국내 정치 쟁점이 됐다. 아르메니아 야권은 정부가 새 헌법을 추진하는 것이 사실상 바쿠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부인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이 헌법 개정을 최종 서명의 조건으로 명시하고 있는 이상 외교와 국내정치의 연결을 완전히 떼어내기도 어렵다.

 

따라서 평화협정의 향방은 단순히 '아르메니아가 헌법을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환원하기 어렵다. 바쿠는 헌법적 모호성의 제거를 법적 안전장치로 보고 있고, 예레반은 이미 협정 문안과 헌법재판소 결정만으로도 영토주장 문제가 해소됐다고 본다. 이 차이를 국내 정치적으로 어떻게 처리할지가 남은 핵심 과제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흐름은 분명하다. 직접교역과 통과운송, 고위급 접촉, 시민사회 교류는 확대되고 있다. 양국 정부는 모두 실질적 또는 사실상의 평화가 형성됐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25년 가서명된 협정은 아직 최종 서명과 발효에 이르지 않았고, 헌법 문제를 최종 서명의 조건으로 보는 아제르바이잔과 이를 국내 문제로 보는 아르메니아의 입장 차이도 남아 있다.

 

남캅카스의 평화는 이미 일부 영역에서는 현실로 작동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제도화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헌법 문제 외에도 국경 획정의 잔여 구간, 지역 안보체제, 상호 신뢰 구축 등 실무 과제들이 남아 있어 헌법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모든 쟁점이 자동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관건은 교역과 접촉의 증가가 이러한 실무 과제들을 함께 풀어내는 정치적 신뢰로 이어질 수 있느냐에 있다.

 

출처

 

아제르바이잔 측

아르메니아 측

국제 교차검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