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다극질서에서 유라시아 헌장까지… 러시아는 어떤 국제질서를 만들려 하나

유라시아뉴스 편집국 2026. 9. 30. 02:42

- 러시아 외무장관, 9월 26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세계정치가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글로벌 사우스와 이스트’가 새로운 성장과 안보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

 

- 이런 ‘다극질서’론은 이번 총회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냐... 러시아는 적어도 2000년대 초부터 단극체제를 비판하고 유엔 중심 다자주의와 복수의 권력중심을 강조해 왔으며, 2023년 외교정책개념에서는 이를 국가전략으로 보다 명확히 규정

 

- 이번 총회의 새로운 점은 추상적인 다극질서론 가운데 ‘유라시아 안보구조’ 구상이 실제 ‘21세기 유라시아 다양성과 다극성 헌장’ 문안협상 절차로 넘어갔다는 데 있어

 

- 다만 러시아 학계에서도 현재 세계를 이미 안정된 다극질서라고 볼 수 있는지를 놓고 견해가 갈린다. 힘의 분산과 그것을 관리할 국제규칙·제도의 형성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지적도

 

 

라브로프가 UN 총회서 언급한 ‘다극질서’

 

9월 26일 뉴욕 유엔총회 연단에 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세계정치에서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글로벌 사우스와 이스트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중심일 뿐 아니라 각 지역의 안보에 더 많은 책임을 지는 ‘주권적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는 이를 러시아 외교정책과 독립국가연합(CIS), 상하이협력기구(SCO), BRICS 등 이른바 ‘글로벌 다수’ 협력의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제시한 국제정세 인식이며, 다른 참가국이 모두 같은 인식을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다.

 

연설의 결론부에서 라브로프는 이 세계관을 보다 구체적인 제도 구상과 연결했다.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유엔헌장과 ‘평등하고 불가분한 안보’ 원칙을 지켜야 하며, 한 국가나 집단이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해 우위를 확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이 제안한 ‘대유라시아 파트너십’과 유라시아 안보구조를 언급하고, 전날 뉴욕에서 ‘21세기 유라시아 다양성과 다극성 헌장’ 작업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 연설에서 ‘다극성’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다. 러시아 정부가 제시하는 논리를 따라가면 세계적인 권력 분산 →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규칙 → BRICS·SCO 등 다양한 다자기구 → 지역국가가 참여하는 유라시아 안보구조로 이어진다.

 

 

러시아의 다극질서론은 어디서 왔나

 

이러한 주장은 2022년 이후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07년 뮌헨안보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냉전 이후 등장한 ‘단극세계’를 하나의 권력·힘·의사결정 중심이 존재하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동시에 중국·인도와 당시 BRIC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정치적 영향력으로 이어져 다극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다자외교의 중요성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러시아 외교정책개념은 2000년 외교정책개념을 계승·발전시킨다고 명시하면서 러시아를 여러 세계적 영향력 중심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유엔이 국제관계 조정의 중심으로 남아야 한다는 원칙도 강조했다. 당시 문서가 동시에 미국·유럽과의 협력과 유럽 안보체계를 중시했다는 점을 보면, 그 시기 러시아의 다극주의는 서방을 국제체제 밖으로 밀어내겠다는 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2023년 외교정책개념에서는 언어가 한층 분명해졌다. 러시아 정부는 바람직한 국제체제가 ‘다극적’이어야 하며 주권평등, 패권의 거부, 국제법, 불가분 안보, 문화·문명적 다양성 등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동시에 서방 국가들이 다시 상호이익과 주권평등을 인정한다면 대화와 협력에 나설 준비가 있다고 명시했다.

 

즉 러시아의 공식 질서구상은 지난 20여 년 동안 같은 모습으로 고정돼 있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서방을 포함한 국제체제에서 러시아의 독립적 강대국 지위를 확보하려는 성격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BRICS·SCO와 비서방 국가들의 역할 확대를 통해 서방의 상대적 중심성을 낮추려는 방향이 보다 분명해졌다.

 

 

구호에서 제도로…유라시아 헌장 협상 시작

 

이런 흐름에서 이번 유엔총회의 실제 변화는 ‘다극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라 유라시아 헌장이 아이디어 단계에서 문안협상 단계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2024년 6월 외무부 지도부 회의에서 BRICS가 다극질서의 주요 제도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유라시아 국가와 지역기구가 스스로 협력·안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벨라루스가 제안한 ‘다극성과 다양성에 관한 헌장’을 지지하면서 유라시아 안보구조뿐 아니라 더 넓은 다극질서의 원칙을 담는 문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26년 9월 25일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외무장관이 뉴욕에서 관련 장관급 회의를 공동주재했다. 미얀마 외교부 공식자료에 따르면 중국, 인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와 동남아시아 국가 등 다양한 유라시아 국가의 대표가 참가했으며, 회의 뒤 협상 개시 공동성명이 나왔다.

 

라브로프는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향후 절차도 공개했다. 참여 희망국들로 개방형 전문가그룹을 구성하고, 2026년 말까지 민스크에서 첫 전문가협의를 연 뒤 2027년 상반기 모스크바에서 두 번째 회의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최종 시한을 미리 정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장기적으로 모든 유라시아 국가와 역내기구에 열려 있는 대륙적 안보·협력구조를 목표로 제시했다.

 

다만 회의 참석과 러시아가 제시하는 국제질서론 전체에 대한 동의는 구분해야 한다. 참가국들은 러시아·중국·인도부터 중앙아시아, 중동, 동남아시아까지 이해관계와 대외전략이 서로 다르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여러 국가가 헌장 논의와 협상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까지다.

 

 

유엔을 대체하기보다 ‘재조정’하겠다는 러시아

 

러시아의 구상을 단순히 ‘기존 국제질서를 폐기하고 BRICS 중심의 새 질서를 만들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라브로프는 이번 연설에서 사이버안보와 인공지능의 국제규칙을 만드는 데 유엔이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대표성을 확대하고 브라질과 인도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한다는 기존 입장도 반복했다. 동시에 BRICS·SCO·EAEU·CIS·CSTO를 러시아가 추진하는 국제협력의 주요 제도적 틀로 열거했다.

 

이를 국제정치의 제도적 층위로 나누면 러시아의 공식구상은 대략 네 단계로 읽을 수 있다.

  • 유엔은 보편적 국제규칙의 상위 틀로 유지하고,
  • BRICS·SCO 등에서는 비서방 다자협력을 확대하며,
  • 유라시아에서는 지역국가와 기구가 참여하는 별도의 안보·협력구조를 만들고,
  •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과는 필요한 현안을 직접 협상한다는 방식이다.

마지막 부분은 이번 뉴욕 외교에서도 나타났다.

 

 

다극질서를 말하면서 미국과 대화하는 이유

 

라브로프는 9월 23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만났다. 미국 국무부는 두 사람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양국관계를 논의했다고 발표했고, 러시아 외무부는 미·러관계 정상화, 외교공관 운영, 경제협력과 인적 교류 등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다극질서를 주장하면서 미국과도 대화한 모순’으로 보는 것은 러시아가 말하는 다극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다. 2023년 외교정책개념부터 러시아는 서방의 패권적 지위를 비판하면서도 주권평등과 상호이익이 인정된다면 서방 국가와 대화할 준비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공식논리에서 미국은 사라져야 할 행위자가 아니라 독점적인 중심의 지위에서는 내려오되 여전히 협상해야 하는 주요 강대국에 가깝다. 유라시아 헌장과 미·러 양자대화는 하나의 협상전략으로 직접 연결됐다는 공개 근거는 없지만, 서로 원칙적으로 모순되는 외교행위라고 볼 필요도 없다.

 

 

러시아 학계도 “이미 다극질서가 완성됐다”고 보지는 않아

 

러시아 정부의 다극질서론과 러시아 국제정치 연구자들의 분석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자 프리마코프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회장인 알렉산드르 딘킨은 2026년 4월 오히려 “2026년 세계가 2025년보다 더 일극적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현재의 전환이 안정적인 다극질서로 곧바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적 다극성’이나 새로운 형태의 양극성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함께 제시했다.

 

러시아국제문제위원회(RIAC) 이반 티모페예프 사무총장은 이보다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 정치학 박사인 그는 현재 질서를 ‘비동시적 다극성’이라고 부른다. 군사·안보, 경제, 금융, 기술과 정보 등 각 영역의 권력구조가 같은 속도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다극세계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같은 RIAC의 안드레이 코르투노프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다극성’과 ‘다자주의’를 구분하면서, 힘의 중심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것만으로 안정적인 국제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힘을 관리할 국제규칙과 협상제도, 다자기구가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번 유라시아 헌장의 의미도 달라진다. 질문은 단순히 ‘러시아의 다극세계가 실현되는가’가 아니라 이미 분산되고 있는 힘을 관리할 새로운 규칙과 협의체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가가 된다.

 

대유라시아 구상을 적극적으로 연구해 온 정치학 박사 티모페이 보르다초프 역시 유라시아를 외부세계로부터 폐쇄된 블록으로 만드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본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유라시아 협력도 외부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개방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내부의 논의만 보더라도 따라서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다극화라는 장기적 방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안정적 다극체제로 정착할지, 새로운 양극화나 제도적 파편화로 이어질지, 또 어떤 국제기구가 이를 관리할 수 있을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유엔헌장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

 

러시아는 자신의 국제질서 구상에서 유엔헌장과 주권평등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은 러시아의 공식서사와 더 넓은 국제사회의 판단이 충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라브로프는 이번 연설에서 2022년 러시아의 군사행동이 유엔헌장에 부합한다는 기존 러시아 정부 입장을 다시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총회는 2022년 3월 결의 ES-11/1을 141개국 찬성, 5개국 반대, 35개국 기권으로 채택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사용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했다. 이는 서방 국가만의 입장이 아니라 유엔총회의 공식 표결 결과다.

 

따라서 러시아가 말하는 ‘유엔 중심 다극질서’의 향후 영향력은 개념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러시아가 제시하는 주권평등·불가분 안보의 해석을 얼마나 많은 국가가 받아들이는지, 유라시아 헌장이 실제 합의 가능한 규칙을 만들어내는지, BRICS·SCO와 기존 유엔체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번 유엔총회 회의에서 확인된 것은 그 과정의 시작이다. 러시아가 20여 년간 반복해 온 다극질서론 가운데 일부가 이제 유라시아 헌장이라는 실제 협상문서로 이동했다. 동시에 러시아는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계속하고, 유엔을 국제규칙의 중심으로 유지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2026년 라브로프 연설의 의미는 러시아가 새로운 다극주의를 처음 선언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래 제시해 온 국제질서 구상을 어떤 제도와 협상절차로 옮길 것인지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줬다는 데 있다. 그 제도화가 실제 질서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는 이제부터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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